Thursday 30 September 2010

침대와 목사



생각보다
두 단어의 만남은
야릇하군.


물의를 빚은 前 성남시장 이대엽氏의 집무실 한 켠에도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그는 짜투리 공간을 활용했다 자랑했지만
결국 침대를 들여 논 그 공간은 '부적절' 낙인을 받았다.

너그러이 생각해보면
집무실 한 켠에 침대가 놓여있든 안마의자가 있든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그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거려니 여길 수 있다.
허나,
그 공간을 그 은밀하고도 사적인 공간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발을 들인다면
아무리 감싸주려해도 그건 그럴 수가 없다.
그 공간이라는게 직무상 하위 관리에게 보고를 받는 일조차 일이 행해지는 자리로써는 매우 부적절한,
그럴 정도로 은밀하고도 사적인 공간이기에.

한편,
목사와 침대는 어떨까.
교회의 목사와 침대가 놓인 집무실이라.
그리고 거기서 행해진 성추행.

알겠나?
침대가 집무실에 있는게 얼마나 부적절한가를.



전병욱 목사의 행실과 관련하여 시끌한 요즈음.
전병욱 본인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인터넷 게시글 차단 요청에 따른 여론 통제 현상까지 더해져
그의 싹수와 관련해 생각을 하고 있다.
그에게 사임과 치료를 권면한 중진 목사들과 그 권면을 거절한 삼일교회를 생각하고 있다.
'치료' 얘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전 목사의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것을 알겠는데
정작 삼일교회는 쉬쉬하기 바쁘고 덮기 바쁘니
글쎄.

이래서
복음주의는 나쁘다.
지성과 이성을 악으로 간주하는 복음주의는 일을 꼭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
정의는 국 끓여 먹었는지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잡을 생각은 않고 꼭 힘 자랑을 한다.
예수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고 예수는 늘 그 책임을 대신 지느라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지 오래다.
한 마디로 복음주의자들멍청하고 무책임하고 부도덕하며 뻔뻔스럽기 그지없다.

전병욱.
당신 하나만 회심의 길에 서면 된다.
그러면 당신이 소속한 교회도 바로 설 수 있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누구도'란 삼일교회를 포함한 기독교인 모두와 당신의 가족, 타종교인, 아울러 무신론자들까지.
마지막으로 예수의 이름까지도.
이것은,
정죄가 아니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거다.
사임하고 치료를 받고 다시 일할 기회를 얻기를 바란다.
거기에
당신의 싹수가 있다.
하지만,
안 그럴거지?

복음주의자가 다~ 그렇지 뭐.

Martin Kippenberger, Zuerst die Füsse, 2008 
관련글.
22 September 2010 ┃ 전병욱
8 October 2010 ┃ 원죄. 너는 죄인이어도 나는 더이상 죄인이 아니다.
15 October 2010 ┃ 전병욱의 삼일교회여!
Sunday, 17 April 2011 ┃ 프로크루스테스의 현신(現身), 삼일교회


Converse With

지나가다 (2010/09/30 21:43)

복음주의가 문제가 아니고, 복음주의를 변질시킨 사람들의 문제겠지요.
부분의 합이 전체이지 않기에...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그런 인간을 대해야 할 마땅한 태도는 죄는 드러내고 책임을 묻되, 용서하고 다시 일어서도록 돕는 것 일 것입니다.

Sophy (2010/09/30 21:59)

예. 그렇습니다.
죄는 드러내고, 책임을 묻되, 용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하는 일이지요.
다만, 삼일교회가 이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주의.
물론 정확하게는 지적하신게 맞을 겁니다.
헌데 저는, 변절치 않은, 거짓말하지 않는 복음주의자를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제게 복음주의와 복음주의자는 동일의미를 갖습니다.



저도 지나가다 (2010/10/01 11:58)

사브리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댓글에 사브리나 님께서 그런 복음주의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셔서
복음주의 전체를 비하하는 만으로도
사브리나님의 말은 설득력을 잃을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성급하게 일반화하셨네요.

그리고 제가 사브리나님의 다른 글들은 다 읽어보지 않아서
무엇을 옹호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변절치 않는,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들만 모여있는 집단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다 죄인이지 않습니까?

전병욱 목사사건의 진실이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았는데
문제가 드러난다면 전병욱 목사가 회개해야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함께 한 몸된 한국교회의 죄, 곧 나의 죄로 여기며
모세처럼 애통하며 함께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모두가 돌을 든 자의 위치가 아니라
간음한 여인의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Sophy (2010/10/01 21:01)

글쎄요.
차라리 저의 성급한 일반화로 매듭지어지는 일이라면 좋겠네요.

'저도 지나가다가'님은 어떻습니까?
지성을 갖춘, 정직한, 강직한, 윤리적인 복음주의자이십니까?
혹, 님이 그렇지 못하다면 님의 주변 사람들 가운데라도 그런 복음주의자를 찾을 수 있습니까?
있다면 정말 그를 만나보고 싶군요.
하지만,
없을 겁니다.
이는 인간이란 존재를 성찰하기만 하면 간단히 나오는 답이니까요.
더불어 20세기 이래 자본주의 인간상이라면 두 말 할 필요도 없지요.

그리고
저는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거한지 벌써 몇 해가 지났고,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도 죄가 사해진다는 그 교리에 따라서도 저는 이미 죄인이 아닙니다.
'저도 지나가다가'님은 여전히 죄인인지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아마도 이것이 복음주의의 치명적 오류일 거라 생각하는데
계속 죄인인 상태로 살다 죽는 것 말입니다.
계속 죄인으로 살았으니 죽어서도 천국은 못 가시겠네요.


전병욱 목사의 사건의 전말은 드러났다고 봅니다.
이미 기사화가 되었으니까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건 그 처결에 관한 거지요.


마지막으로
전병욱 목사에게 사임과 치료를 권면한 중진 목사들과 제가 들고 있는 것은
간음한 여인을 치려고 든 죄 있는 자들의 돌이 아닙니다.
님이 사용하신 논리는 복음주의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즐겨 쓰는 방식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물타기 하기 위해 벌이는 그야말로 뻔뻔한 작태지요.
이를테면,
여기 강간범이 있습니다.
그가 당신을 강간했습니다. 교회는 님이 드신 논리를 근거로 책임을 묻지 말라 했습니다.
얼마후 다시 그가 당신을 강간 했습니다. 교회는 이번에도 같은 논리로 책임을 묻지 말랍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그가 또 당신을 강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합니다.
그는 왜 당신을 계속 강간할까요?
아마 그는 아무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에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당신을 계속 강간해도 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그때도 '죄 없는 자 돌 던지라' 하실 겁니까?
1세기 유대에서 돌에 맞는 형벌은 지금의 사형에 해당하는 최고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의 최고형이고요.-
간음이 죽임을 당할만큼 큰 죄인가요?
같이 간음한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가고 여자만 돌에 맞는 형벌을 당하고 있었을까요?
이래도
전병욱 목사에게 사임과 치료를 권면한 중진 목사들과 제가 돌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하며 사십시오.
팔이 아무리 안으로 굽어도 생각은 하며 삽시다.



ksj7773 (2010/10/09 19:01)

참 애석한 일입니다. 변호도 변명도 부질없는 짓임을 압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기독교 혹은 복음주의를 공격할 호재를 얻어 늘 말만 앞세우고 행함이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겐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마음껏 두들기고 패십시요.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막힐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은 당연함이 아닐까요? 목사의 넘어짐은 얼마든지 있을수 있습니다. 마지막때에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고 별이 떨어진다는 예수님의 예언은 이런걸 두고 한 말씀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850명의 이방신을 섬기던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영적 싸움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을 태우게하고 3년동안 비가오지 않던 가뭄에서 비를 내리게 한 능력의 종 엘리야가 이세벨 왕비를 피해 산으로 도망한 것을 보면 사람이 가진 능력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고 보면 늘 겸손하고 자기관리를 충실해야함은 누구나 귀담아 들어야함이겠지요. 그래도 우리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처분이 어찌할것인지를 사뭇 기다림이 도리가 아닐런지요. 저마다 하나님이 된것처럼 마치 심판자나 된 것처럼 경거망동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제사를 원치않고 인애를 원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신말씀을 다시한번 새겨볼때가 아니가싶습니다.

Sophy (2010/10/09 22:06)

복음주의자들은
참으로
한결같군요.


시답잖은 변명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마땅한 책임을 질 생각은 않고
어떻게든
책임을 축소하려
혀부터 놀리고 보는
그 작태는,
정말
한결같군요.

그게
복음주의자들이지요.
곧, 복음주의이기도 하고요.


굶주린 개가
고기를 뜯으려 달려드는 것으로 밖에
정녕,
아니 보이십니까?
회복에 대해
치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정녕,
아니 들리십니까?
눈을 닫고
귀를 닫고
대체 얼마를 살았길래
이것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답니까.

또한,
어째서 당신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십니까.
당신이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십니까.
당신이 걱정을 해야 할만큼 하나님이 무능력한 신(神) 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걱정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 분은 전지전능하시니까요.
그러니
그 분의 일을 가지고
주제넘게
왈가왈부(曰可曰否)
노심초사(勞心焦思)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위한다 마십시오.
십계명의 제 3 계명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짖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지막때에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고 별이 떨어진다는 예수님의 예언은 이런걸 두고 한 말씀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850명의 이방신을 섬기던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영적 싸움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을 태우게하고
3년동안 비가오지 않던 가뭄에서 비를 내리게 한 능력의 종 엘리야가 이세벨 왕비를 피해 산으로 도망한 것을 보면
사람이 가진 능력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같은,
이런 헛소리는
두 번 다시
아무게도
어디서도
하지 마십시오.
범죄자가
죄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작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그래도 우리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처분이 어찌할것인지를 사뭇 기다림이 도리가 아닐런지요.
저마다 하나님이 된것처럼 마치 심판자나 된 것처럼 경거망동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제사를 원치않고 인애를 원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신말씀을 다시한번 새겨볼때가 아니가싶습니다."
아무리
동정심이 값 싸기로서니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님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인 것 조차 알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 하시는지를 어찌 알거며
무엇이 우선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갖다 붙이기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복음주의자들의 그 몰지각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자기 합리화에 빠진 복음주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저주하며 돌아섰는지 아십니까.
당신들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뿐만이 아니지만
이것을 광범위하게 적용하면 책임의 분산효과가 발생하므로 여기선 복음주의만 언급합니다.-


회개가
용서에 앞섭니다.
회개가 없으면
용서도 없습니다.
관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이치(理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확인하시는게 좋겠습니다.-

관용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이제,
해야 하는 일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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