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목사의 사건을 대하며
'죄인'이 그토록 요긴한 변명거리로 쓰일 줄, 차마 몰랐다.
참
괘씸하다.
일단,
원죄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자면
원죄는 틈이다.
신(神)과 인간은 분리되어 있는데 그 사이, 그 틈이 죄라 명명된 거다.
그래서
죄가 많다는 건 틈이 많이 벌어졌다는 것이고
죄가 적다는 건 틈이 좁다는 것이며
죄가 없다는 건 하나님 안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성경적 죄는 규범을 어기는 행위와 같은 잘못이나 악(惡)을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 거한다 하여도 잘못은 가능하다. 하나님 안에 거한대도 인간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만으로도 죄사함과 구원이
가능하다.
-내게
교리집 어디에 몇 조 몇 항에 그것이 쓰여 있는가는 묻지 마시라.
나는 대답 못한다. 각 교단별 교리집이 내게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정,
증거가 필요하다면 아쉬운대로 사영리를 참조하시라.-
그러면,
세례를 받았다면
혹은
사영리의 마지막 문장을 읊었다면
그 시점을 기준으로 당신은 더이상 죄인이 아닌 것이 되어야 하는 거다.
헌데,
그런가?
당신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가리켜 원죄에 갇힌 죄인이라 부르고 있지 않는가.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
-잠복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여인에게,
아니지.
여인을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가 한 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았다.
상황 종료.
이제,
예수가 말한 여기에서의 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원죄일까, 잘못일까.
원죄로 읽힘이 마땅할까, 잘못으로 읽힘이 마땅할까.
참고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건 1세기 유대사회에선 정당한 행위였다는 걸 잊지 말자.
답은
원죄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댓글에 그 이유를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단, "정답은 예수만 아는 것" 같은 당연한 이유는 사절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주욱
이것을 관용의 문제로 간주해왔다.
왜?
그것은 이제부터 당신들이 생각해 봐라!
당신들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병욱 사건'에 '죄인'이 들먹거려지는 거니까.
정리를 하면,
사영리는 엉터리고
-그 이유에 대한 피력은 나중에 하자. 지금 당장은 빠질 진(津) 때문에 내키지가 않는다.-
기독교 교리는 코미디고.
-마찬가지로 '왜'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원죄도 사라지고
'Medium 예수'도 사라진다.
그
필요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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